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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By J

    무엇을 망가뜨리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겉모양을 부수거나 어그러뜨려 망치는 것, 속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진 채 그것을 알지도 못하게 하는 것. 망가뜨린다 하여도 어울리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었기에 카루마 고우는 늘 신중한 방법을 골랐다. 단지 손쉽다고 해서 고를 것이 아니다. 완벽해야 한다. 한 방에 숨통을 끊고자 하면 그만큼 칼날은 날카로워야 하였고, 총을 쥔 손은 한 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복수도 마찬가지였다. 미츠루기 신의 어린 자식을 카루마는 자처하여 거뒀다. 저지르지 않은 죄는 단두대의 칼날이 되어 평생토록 어린 사슴과 같은 목 위에 드리워진다.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완벽의 균열을 안긴 남자의 자식이었다. 칼날이 떨어지는 순간의 고통으로 복수를 끝낼 생각은 없다. 생채기로 벌어진 살갗에서 곪아드는 고통은 오로지 미츠루기의 몫으로 남고, 치료되지 않는 상처는 결국 그의 목을 조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겠지. 미츠루기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완벽한 파멸이었다. 그 파멸을 위해 카루마는 무수한 생채기를 냈다. 자신의 어깨에 박힌 탄환에 비하면 싼 값이었다.

   찬 바람과 뒤섞여 첫눈이 내렸다. 열 일곱 살의 소년이 한 겹의 옷으로 버티기에는 가혹한 겨울이었으나 미츠루기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잘, 잘못했습니다, 제 실수로. 이가 덜덜 떨리고 혀가 감겨들었다. 급기야 숨통이 벌어지고, 물가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목울대가 떨리는 것을 카루마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 스승님. 하얗게 입술에서 숨이 터졌다. 소년의 코 끝에 얼마 되지도 않는 온기가 일렁였다. 바로 현관 앞이었으나 그가 서 있지 않더라도 미츠루기는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을 터였다. 이 저택에 그가 소년을 들인 뒤 손수 맨 복종의 증표가 너덜거렸다. 크라바트의 색보다 훨씬 하얗게 질려, 열 아홉 살의 미츠루기는 고개를 숙였다. 하얗게 어깨에 눈이 내렸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달싹이며 미츠루기는 곱아드는 맨발가락을 펴려 노력한다. 시선은 곧게 한 채로. 어깨를 펴고. 평소 입는 셔츠와 조끼, 딱 맞는 바지. 목에 매달린 크라바트. 모두 자신이 입히고 가르친 것이었다. 완벽한 그의 소유물답게 미츠루기 레이지는 얼굴이 하얗게, 푸르게 질려갈 때까지 폭설 속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카루마는 지켜봤다.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물을 필요는 없다. 미츠루기는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했다. 어린 것이 꼭 아비를 닮아 불쾌하였기에 그는 미츠루기에게 입을 다무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지금은 입을 다물지 않을 때였다. 추위에 파르랗게 언 입술에서는 응당 고해가 쏟아졌다. 

   스승님, 제가, 제가, 잘못. 말조차 얼어붙어 눈에 삼켜지는 내내 미츠루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눈밭에 처음 맨발로 세워졌을 때와 똑같은 표정.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듯 파리하게 질린 흰 얼굴을 바라보며 카루마는 소년이 차라리 그 자리에서 나자빠져 애원하길 바랐다. 구차하게 제 다리를 잡고 그만해달라고 빌기를 바란다. 저 천한 짐승이 입을 벌려 저를 구원 삼아 구걸하는 목숨을 걷어차고 짓밟아 이 통증을 낫게 할 수 있다면. 

   하얗게 나리는 눈 아래서 소년의 모습은 점점 희어진다. 그 너머로 카루마 고우는 그 날을 회상했다. 치욕스러운 상처는 견딜 수 없이 욱신댔다. 피할 새도 없이 이미 깊이 뿌리박힌 탄환처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들. 기절한 채 누가 자신을 쏘았는지도 모를 어리석은 사내의 한 마디로 인해 제게 난 균열들을. 카루마는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남자의 흰 와이셔츠에서 번져 짙어지는 죽음의 자취를 생각한다. 흰 눈 아래에서 시야는 붉어지고, 또 다시 상처가 욱신댔다. 참을성은 귀족의 소양이다. 그렇게 듣고 자라오지 않았더라면 벌써 어깨를 움켜쥐었을 것이다. 그는 미츠루기 레이지가 그 날 남긴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진실은 상처와 함께 은폐됐다. 남은 것은 복수심이다. 미츠루기 레이지가 제게 남겼던 상처만큼이나 깊게 심장에 파고들어 미츠루기를 죽일 독.

   시침이 한 바퀴를 돌았다. 카루마 가문의 문장이 휘황찬란하게 새겨진 시계를 꺼내본 카루마는 그제서야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제 주제를 알 시간이었다. 세 발짝을 내딛자 방 안을 잔뜩 휘감고 있었던 온기가 반쯤 언 어깨를 녹인다. 세 발짝째에서 카루마는 멈춰선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긴 소리와, 미츠루기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지팡이를 짚은 채 비스듬히 비껴나간 시선 끝에 미츠루기는 늘 가르쳤던 대로 적절한 간격을 두고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한 흰 살결은 빨갛게 익듯 달아오르고, 눈의 흔적은 물기가 되어 어깨와 발을 적셨다. 눈꺼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물방울이 코와 뺨을 타고 떨어진다. 입술에서는 신음 한 마디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눈물이 아니기에 카루마는 소년이 아직 제 주제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처럼 소년을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았다.

"레이지."

네, 스승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갸날픈 몸은 휘청이지 않는다. 내뱉는 목소리엔 아직 겨울 바람이 섞여 들었으나  처음 바깥으로 내보냈을 때보다는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교육에는 합당한 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먹이와 채찍을 번갈아 쓰는 류의 훈련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이름을 부르는 말에 미츠루기는 제 몸을 겨우 가누며 걸어왔다. 전처럼 쓰러져 엎어지기라도 했다면 눈길 하나 주지 않았을 것을, 불쾌하게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고 제 앞에 도달한 소년을 그는 바라본다. 그 곧은 자세도, 눈을 피하지 않는 것도 결국에는 자신이 하나하나 덧씌워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했다. 그런 자세로 자신 앞에 섰던 사내를 그는 알고 있다. 미츠루기 신, 자신의 완벽에 균열을 낸 그 남자의 모습은 해마다 유령처럼 미츠루기의 얼굴 위를 배회한다. 그것이 견딜 수 없어 카루마는 이를 사려 물었다.

   카루마는 손을 뻗는다. 흰 장갑에 단단히 감싸여진 손가락은 뺨을 감싼다.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살갗이 서서히 미지근하게 녹아든다. 처음 미츠루기를 데려온 이후부터 소년을 만질 때 그는 절대 장갑을 벗지 않았다. 불결한 것. 천한 것. 그것에게 줄 온기는 없다. 종종 뺨이 발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멍이 번질 때까지 미츠루기를 매질하였던 까닭에 미츠루기는 가끔 손만 닿아도 어깨를 떨었으나 지금은 얇은 입술이 습자지마냥 떨릴 뿐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짐승은. 제가 아직은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 생각과 함께 치밀어오른 역겨움과 경멸을 카루마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품기에는 저급한 감정이다. 레이지, 조금 손을 떼면 미츠루기는 조용히 장갑의 표면에 제 뺨을 갖다댄다. 카루마가 가르친 것이었다. 그래, 울지 않았구나. 레이지. 메마르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꼭 기다리던 칭찬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츠루기의 눈은 갈증에 찬다. 그때만큼은 미츠루기의 눈동자에 박힌 것이 꼭 사내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었다. 독실한 신도처럼 그 눈은 숭배에 찬다. 내던져둔 물건이 주인의 손길을 갈구하듯이 천박한 구걸이었다. 그래, 그러한 눈을 해야지.

   뺨을 댄 미츠루기가 입을 열었다. 죄송, 합니다. 카루마는 그 입술이 열리는 것을 바라봤다. 천박한 분홍이었다. 미츠루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승이 자신을 눈 내리는 밖으로 한 식경이나 쫓은 연유가 사실 부당하다는 것을. 제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였던 것도. 고집에 못 이겨 첫눈이 내리는 정원에 있었던 것도, 실컷 놀다 들어온 메이가 그 날 밤부터 덜컥 감기에 걸린 것도. 모두 제 잘못이 아닌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츠루기는 감내했다.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폭력과 죄를 후벼 파는 독설들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처럼 버티고, 이겨낸다. 소년의 회색 눈동자를 볼 때마다 카루마는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의 그림자를 젖히듯이 턱을 잡아 끌어당긴다. 사내의 그림자에서 미츠루기는 끌려 나온다. 반성하느냐, 레이지. 턱을 잡힌 채 미츠루기는 주억였다. 

   소년은 카루마의 발 아래 꿇어앉아 말 없이 단지 늘 그랬던 것처럼 손에 뺨을 댔다. 장갑 아래에서 순순히 경련하는 살갗을 카루마는 경멸했다. 당장 자신이 목을 졸라 죽일지언정 저를 보며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할 눈에 어리는 숭배를 경멸했다. 그 숭배 뒤에 가려져 있을 것들이 경멸스럽고 끔찍히 두려웠다. 미츠루기 신을 빼닮은 빛이. 자신이 어떻게 짓밟든 미츠루기 레이지는 다시금 일어선다. 마치 그런 방식밖에 알지 못한다는 듯이. 깊숙한 추궁과 불리한 상황에서도 제게 삿대질을 하던 그 사내의 빛나는 눈처럼. 천한 것 주제에. 미츠루기는 어느 새 고개를 바로 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 깊숙이 핀 불꽃이 완벽하게 존재해야 할 것들을 무너뜨린다. 지나친 감정, 그 완벽의 균열에서 또 다시 불꽃이 일었다. 쓰라린 상처가 다시금 욱신댄다. 천박한 것, 네가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천박한 것. 그 남자와 빼닮은 얼굴로 무엇을 또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냐. 손에 닿는 것은 이미 불꽃이다. 쏟아지는 매질 속에서 미츠루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냈다. 이래도, 이래도 이겨낼 것이냐.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아슬한 침묵 속에서 체벌은 이어진다. 카루마는 한 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년의 모습을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봤다. 

  벽난로에서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타던 불꽃은 사그러든다. 쓰러진 소년의 한쪽 얼굴에 붉게 선혈이 흘러내린다. 어디를 보는지도 모를 그 눈동자에 벽난로의 불꽃이 어른댄다. 아, 그 눈동자. 눈 앞의 미츠루기는 어느 새 쓰러진 미츠루기 신으로 일그러져 화한다. 하얗게 점멸하는 엘리베이터 아래, 분명 죽었을 미츠루기 신의 눈빛이 안경 너머에서 자신을 꿰뚫을 듯 빛났다. 이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겠습니까. 입술이 벌어지고 불꽃이 화한다.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고, 몇 번이나 미츠루기 신은 눈앞에서 붉게 번졌다. 그만! 그만! 완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기에 휩싸여 카루마는 사내의 환상을 밟고 짓이겼다. 환상은 미츠루기 신에서, 어린 미츠루기 레이지로, 그리고. 

스승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겨울과 같은 서늘함이 몸에 감겼다. 유치장 너머 미츠루기 레이지는 환상처럼 서 있다. 꼿꼿한 자세로 미츠루기는 응시한다. 존경했습니다. 말이 잘려 떨어졌다. 악을 쓰고 싶었으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대신 차라리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다 여겨 주었을텐데. 천한 것에게 듣는 말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버러지의 발버둥이나 마찬가지였을텐데. 얼마 안되는 침묵과 그 말만을 남기고, 미츠루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금 팔을 뜯어낼듯 욱신거리는 환상통 속에서 카루마 고우는 또 다시 패배하였음을 직감했다.  

마감 후기

: 고우미츠... 간미츠를 쓰려다가 뭔가 카루마 고우는 대체 미츠루기 레이지를 어떻게 대했을까, 미츠루기 신이라는 평생을 다해 증오할 존재가 어쩌다 미츠루기 레이지에게 옮겨가고 투영하게 되었나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쓴 글입니다. 카루마 고우의 입장에서 써 보고 싶었는데 어렵다는 걸 깨달았고... 성애는 없으나 조합이라는 느낌으로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합작 주최하신 부각님께 그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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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신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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